내 안의 열다섯 살을 발견하다-삿포로 눈축제를 다녀와서 /정미경
눈은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눈은 어린이의 마음을 갖게 한다.
눈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눈은 40대라는 물길을 따라 흐르고 있는 내 마음 속에서
열 다섯 소녀의 마음을 발견하게 한다.
눈을 보러 가는 먼 여행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설레임과 낯선 곳에서의 며칠 밤을 기다리게 한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친구들과 수학여행 떠나는 중학생처럼 뭘 입고 갈지, 밤에는 뭐하고 놀지, 선물은 무엇을 살지 이리저리 생각하느라 다른 곳에 집중할 수 없는 아이처럼 들뜨게 한다.
삿포로 눈축제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생일선물이었다.
가족과 함께 가는 여행이 아닌 온전히 나 자신으로 가는 여행이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누구의 아내도 아닌, 누구의 엄마도 아닌, 나 자신.. 내 이름이 누군가에게 불려지는 건 내 안의 열다섯 살도, 스물 다섯살도 부끄럽지 않게, 눈치 보지 않으면서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 함께 가지 않는다는 건 자연인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기도 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나만의 가식적인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줄 수도 있다는 뻔뻔함을 누릴 수도 있다.
눈은 치토세 공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껍질이 흰빛을 띄는 자작나무가 찻길 옆에 심어져 있었고 자작나무의 주변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다. 삿포로 거리의 눈은 지붕이며 공터에 어찌나 높이 쌓여있는지, 아이들은 공터 한쪽으로 치워놓은 눈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고 있었다.
또 찻길 옆으로 치워진 눈은 눈금을 표시하는 쇠기둥이 꽂혀 있었다. 찻길에 내린 눈을 한쪽으로 치워놓았을 법한 눈은 폭이 좁고 오른쪽에 핸들이 있는 일본차들이 1m도 넘게 쌓여 있는 눈 담벼락을 스칠듯이 지나다녔다. 소녀들은 눈발 내리는 거리에서도 짧은 스커트에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고 맨살이 다 보이는 스타킹을 신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를 지나다녔다. 맑고 차가운 공기 덕분인지 하늘의 별도 달도 더 밝았다. 더 선명했다.
오타루에서 본 눈빛거리축제는 마치 사랑을 확인하는 거리 같았다. 사랑을 확인하고 새로운 사랑을 발견하는 거리, 떠난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아프고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거리 같기도 했다. 눈 항아리 안에 초로 불을 밝히고, 하트 모양이나 눈사람 모양 등의 눈 조각을 만들어서 그 주변을 밝히는 촛불의 일렁이는 모습이 그 불빛만큼 따뜻해지고 밝아지는 것 같았다. 더 환한 빛이 아닌 그만큼의 빛과 그 만킁의 마음 설레임.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보면서 내 눈빛도 같이 흔들렸겠지, 내 마음도 같이 불빛만큼 다정했겠지.
노보리베쯔 유황온천을 감싸고 있는 산길도 아름다웠다. 눈은 어른 허벅지까지 빠질만큼 깊이 쌓여있었지만 눈 내린 산은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게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푹푹 빠지는 산길을 걷거나 비스듬한 산을 데굴데굴 구르면 눈 위에서 노는 아이들의 마음을 얼마나 가볍고 행복한지 느껴볼 수 있고 내 안에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차곡차곡 쌓여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따뜻한 감성을 물결에 일렁이는 반짝이는 모래알처럼 살며시 떠오르게 한다. 옆 사람에게 친절한 웃음을 건네게 한다.
삿포로 눈 축제는 특별한 경쟁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이런 행사를 하게 만들어주는 자연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언제나 해 오는 소박한 축제였다. 하지만 일본 구석 구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세상 구석 구석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삿포로에 오게 만드는 축제였다.
특별한 것은 세상에 없지만 사람과 축제와 여행을 즐기게 만들려면 내가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것을 더 아름답게 만들려는 소박한 의지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것, 마음속에 숨겨진 아이를 발견하게 하고 사랑을 느끼게 하고 그리운 사람과 그리운 곳을 떠올리게 하고 그 속에서 촛불이 밝히는 그만큼의 불빛으로 내 마음을 밝히는 따뜻한 기대가 있으면 된다. 희망이 있으면 된다.
내가 나에게 준 생일 선물, 삿포로 눈축제 여행,
가끔 내가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 기다리고 있지만 말고 받고 싶은 선물을 나에게 주고 그 선물을 받아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란 내 아이들도 자신에게 선물을 줄 줄 아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따뜻한 선물을 전해줄 줄 아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이번 여행으로 몇 달 동안 살까? 말까? 에서 말까를 선택해야 할 일이 많아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