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몸짓으로 내 몸의 말 알아듣기
-춘천 마임축제 ‘미친 백조의 호수’를 보고
미친 듯 발광하는 내 마음의 움직임을 가라앉히는 방법에는 어떤 게 좋을까
며칠 전에 벌어진 학교 일로 두려움에 억울함에 속상함에 밤새도록 울다 깨다를 반복하며 내가 주문처럼 외웠던 말은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책 제목 같은 것들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그 일 이후, 주변 사람에게 내 감정을 송두리째 드러내 보이면서 나 또한 상대를 비난하게 되고 나의 바닥을 드러내면서 나는 또 갈등했다. 말과 눈물로 내 감정을 쏟아내도 풀리지 않는 답답함을 느낄 때, 나의 바닥을 드러낸 하찮음에 또 다시 갈등할 때, 그 때 나는 다른 사람의 ‘몸짓’을 만나게 되었다.
그 몸짓은 흐느적거리면서 바닥에 끌리던 내 마음을 단정하게 했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나는 내가 아니라는 단순하지만 가볍고 명쾌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상대를 부정하고 비난하는 감정에서 벗어나 ‘그래, 맞아 그 사람이 말한 것도 틀린 건 아니다’ 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나는 나이며 내가 원하고 잘하는 것에 정성을 쏟은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는 자신감이 천천히 차오르는 샘물처럼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60분도 채 안 되는 그 시간에 덜컹거리던 내가 잠잠해지는 느낌이었고, 이리저리 튀어 다녀서 잡을 수 없던 마음을 다치지 않게 살그머니 잡은 느낌이었다.
‘미친 백조의 호수’ 두 배우의 몸짓은 특별했다. 몸짓 하나하나에 정성과 애틋함이 땀으로 눈빛으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안무가 김남진의 날개 짓 같은 손놀림과 장애인 행위예술가 강성국의 몸이 보여주는 안타까움 속에는 ‘환경보호’라는 메시지보다 더 안타깝고 슬프게, 그러나 정성껏 새로운 메시지를 내게 보냈다. 마치 무대 위의 반짝이는 어느 한 별과 객석의 내 눈이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넓은 세상 속에서 아무로 눈치 채지 못하는 별과 나, 둘 만의 눈 마주침 같은.
몸의 말은 때로 기쁘다. 몸의 말은 때로 슬프다. ‘미친 백조의 호수’는 슬픈 몸의 말이었다. 그러나 슬픈 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기쁘게도 내 몸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내는 나의 신호를 읽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내게 한 비난과 질책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내 몸의 말과 내 마음의 말에 다가가고 있었다.
‘미친 백조의 호수’는 그런 마임이었다. 만약 춘천에서 마임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도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아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욕을 하지 않고도 내 자신을 헐뜯지 않고도 내 마음은 잔잔해졌고 평화로워졌다.
어쩌면 예술이란 것은 어떤 행위로 예술가가 꿈꾸는 것을 전하기도 하겠지만 내 놓는 순간 보는 사람, 듣는 사람, 느끼는 사람이 딛고 있는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도록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싶다. 아. 그래서 나는 ‘마임’이라는 슬픈 몸의 말을 가진 예술이 내 삶에 다가와 나는 나대로 단아한 모습으로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미친 백조의 호수’에서 두 배우가 전해 준 반짝이는 메시지의 시작은 바로 이거였다.
‘사람들은 누구나 백조이길 바라면서 살지. 하지만 나는 백조이길 바라는 닭이었어.’
내가 나를 부둥켜 잡고 놓지 않으려고 했던 자존심, 이기심으로부터 나를 내려놓는 순간 모든 것이 편해졌고 잠잠해졌다. 나는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