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길 달이 뜨니 상저구에 해가진다.
(섬진철교 ~ 주교천)
이제부터는 하동포구를 떠내려가야 한다.
하동포구는 팔십 리다. 아무도 재어본 사람은 없다.
단지 그렇게 불려왔다.
심리적, 심상적 거리가 더 맞을 것이다.
구십 리도 아니고 칠십 리도 아닌 팔십 리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야 떠났던 님이 잊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나 보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는 섬진철교를 지나면 강은 상저구포구를 휘감아 돌아
하저구와 신방촌으로 접어들어 남해고속도로가 달리는 섬진강교 밑을 빠져나간다.
상저구에서는 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호수를 닮았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이곳 상저구는
하루에 꼭 한번 씩은 창수까지 다 드러내 놓다가도
달이 휘영청 밝아오는 날이면 산달이 된 여인처럼 배가 불러와
강은 창일하고 충만해진다.
그래서 상저구는 극과 극을 달리는 동네다.
하지만 물이 빠지고 강바닥이 드러날 즈음에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그 바다 같은 강은 온통 사람 반 재첩 반이다.
상저구 아래는 하저구다.
이 두 포구는 섬진강이 태어나면서부터 섬진강과 함께 해 왔던 동네다.
한때는 이곳은 여수로, 부산으로 향했던 배들이 출항하고 귀항했었고
섬진강의 영광을 독차지 했던 곳이었으며
재첩의 주산지이자 온갖 어산물이 유통되었던 곳이다.
세월이가면 언젠가는 잊어지듯이,
상저구와 하저구는 점차 세월 속으로 잊혀져 가고 있다.
단지 몇몇 재첩 잡이 배와 돈 안 되는 식당들만 포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상저구와 하저구의 여인들은 다른 이들 보다 갑절의 인고의 삶을 살았으리라!
남들은 모내기를 다 하고 난 후 달포를 쉬는 날에도
강물에 깊숙이 몸을 맡기고 재첩을 잡아 그것을 밤새도록 끓이고 맛을 내어
다음 날 오전에 십리 이십 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쌀이나 보리를 재첩과 물물교환 하기 위해
해질 때 까지 사방천지를 외치고 다녔었다.
아직도 내 귀에는 재첩아주머니가 외치는“갱조갯국 사이소!”.....
귓전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상저구를 가보면 마음이 그리 편치가 않는다.
한번 씩 이른 아침에 상저구를 조망할 수 있는 읍내 시의 언덕에 올라
미명 속에 깨어나는 섬진강을 지켜보노라면 잠자던 정신이 번쩍들게 한다.
새벽에 살포시 가는 눈을 뜨는 상저구 섬진강은 아침을 맞이하기에 분주하다.
이처럼 섬진강은 늘 잠자는 나의 몸과 영혼을 깨우는 천사다.
또 하나의 잊혀져 가는 포구는 신방촌이다.
이곳은 하동재첩의 원조격이다.
한참 성업이었을 때에는 수십 곳의 재첩전문점이 있었으나
이제는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다.
강 건너 전라도 광양 진월의 월길리는 달이 뜨는 동네다.
섬진강에서는 달맞이를 가장 먼저 하는 곳이다.
어제와 같은 보름날이면 달은 산에서가 아니라 강에서 떠오른다.
강 건너 하동 땅 정안봉 위로 보름달이 머리를 내 밀자 말자
달은 섬진강으로 빠져버린다.
첨벙거리는 소리도 없이 빠져버린 달은 강물에 떠내려가지도 않는다.
내가 그 자리에 있는 한, 달은 강물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상저구는 해넘이를 가장 시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그의 해넘이는 역동적이고도 화려하다.
섬진철교를 넘어 해가 무동산에 걸터앉으면
상저구포구의 재첩잡이 배위에는 청둥오리가 내려앉고
갈대는 태양을 향해 온갖 율동을 아끼지 않는다.
월길을 지나면 돈탁, 오추마을이다.
여기서부터는 섬진강은 바다로의 행진을 위한 전조작업이 한창이다.
간간히 바다갈매기 같은 새들도 날아다니고
강가에는 이미 갯벌이 형성되어 있다.
검은 진주처럼 빛나는 갯벌위로 황금색 갈대가 아침태양에 빛난다.
바다로 향하는 섬진강을 위한 마지막 세레모니가 준비된 듯하다.
6백리를 달려 온 그 숨 가쁜 여정에 위로를,
언제 또 볼지 모르는 운명을 위한 기도가 섞여 있는지 모른다.
강물도 초연해 보인다.
갈대의 화려한 세레모니가 펼쳐지더라도 못 본 척 그냥 스쳐지나버린다.
그의 귀향을 운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갯벌위로는 가느다란 물골이 나 있다.
그 위로 지난밤에 게와 가재와 조개들이 신나게 놀았을 것이다.
섬진강은 사람에게 뿐 아니라 미물들에게도 이처럼 천국이다.
눈앞에 두우산이 보인다.
그 너머가 강과 바다의 경계인 섬진대교다.
불과 이십 리만 가면 바다다.
달이 뜨는 월길, 해지는 상저구가 벌써 그립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