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우산, 너를 호국의 산으로 명명하노라!
(두우산 ~ 배알도)
마지막에 가까이 갈수록 가슴이 떨린다.
처음에도 그랬었다.
첫 눈이 진안고원을 덮어 설국이 되었을 때
자칫 그에게 접근을 허락받지 못할 운명이었지만
데미샘으로부터 접근을 허락 받은 것은 축복이었다.
한 발 한 발 데미샘으로 가까이 갈수록 내 가슴은 조렸었다.
강은 산에서 시작해서 산에서 그 종점을 이룬다.
섬진강의 마지막 지킴이 두우산은 불과 수백미터에 지나지 않는 작은 산이다.
아래로 고포리가 있고 저 멀리 갈사만과 광양만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두우산 바로 발아래 강 건너는 망덕포구가 두우산과 마주하고 있다.
생각보다 두우산은 접근을 쉽게 허락하였다.
6백리를 강과 함께 흘러왔던 섬진강사나이에 대한 일종의 예의일까?
초겨울 정취가 그림이었다.
백운산으로 떨어지는 태양에 억새가 눈부시다.
구부능선에는 양 갈래 길이 나 있었다.
길을 가다보면 흔히 만나는 일이다. 오른쪽일까? 왼쪽일까?
그 갈림길에서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섬진강을 걷는 길에서는 강은 늘 나의 나침반이었다.
길이 아니라 강만 따라 걸으면 되었으니까....
내 마음의 흔들림을 다잡아 주는 것도 섬진강이었으니까...
정상으로 가까이 가니 두꺼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 마리 두 마리가 아니었다.
등산로 변에 서 있는 바위들이 모두 두꺼비 형상같이 보였다.
섬진강에 살았던 두꺼비가 여기까지 올라왔었나 보다.
섬진강의 섬(蟾)자는 두꺼비를 뜻한다.
고려 말에 왜구들의 침략에 두꺼비들까지 맞섰다는 것이다.
그 미물과 같은 동물들이 그랬다면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드디어 정상이다.
저 멀리 아득히 천왕봉이 산들을 지휘하고 있다.
백운산, 노고단, 구재봉, 형제봉이 그를 호위하고 있다.
이들은 강의 마지막 질주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산 그림자가 늘어지고 어둠이 내리니 강물은 더 빛나기 시작했다.
달이 뜨는 월길, 해가지는 상저구, 재첩의 옛 영화를 누렸던 신방촌포구...
큰 허리를 휘감아 돌아가는 강의 위용이 넘쳐났다.
작은 고기잡이배가 파문을 남기고 섬진강교를 지나 하동포구로 올라가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진다.
정상에는 더욱 뚜렷한 진짜 거북이가 강의 북쪽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눈은 천왕봉과 접점을 이루는 듯하다.
거북바위 바닥에는 또 하나의 호국의 증거가 남아 있다.
음각으로 새겨진 검(劍)이다.
길이가 석자 정도 되는 형상이 뚜렷하게 생긴 검이다.
칼끝은 북쪽을, 손잡이는 남쪽으로 놓여
거의 정확하게 섬진강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비록 세월 속에 그 겉모양은 무디어 졌지만 그 속에 비장함은 살아 있었다.
“죽도록 너의 운명과 같이 하리라!”검에서 그런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거북바위에서 남쪽으로 오십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는
또 하나의 호국의 잔상이 남아 있다.
허물어진 봉수대다.
이 봉수대는 섬진강이 안기는 갈사만과 광양만을 응시하고 있다.
축조기법에 따르면 신라시대 축조된 것과 닮았다고 하나
주변에서 발견된 유물은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그랬으니 아마도 1천년은 넘게 섬진강을 지키고 섰으리라!
이 봉수대는 금오산 봉수대에
섬진강하구와 남해안의 정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은 봉수대에서 힘이 느껴졌다.
허물어지고 훼파된 봉수대와 무디어진 검에서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이 시대에 누가 이 허물어진 봉수대를 다시 축조할 것인가?
누가 끝이 무뎌진 검의 칼날을 다시 세울 것인가?
강 건너 바구리봉을 넘어가는 태양이 정확히 봉수대의 끝점을 통과한다.
해시계와 같이 시간을 알려주는 듯하다.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에 매일 반복된 일상이었을 것이다.
두꺼비, 섬진강과 평행을 이룬 작은 검, 봉수대...
키 작은 두우산에서 발견한 호국의 산증인들이다.
퍼즐을 맞추듯이, 난해한 형상의 모자이크를 통해 완성된 그림을 상상하듯이,
깨어진 그릇을 끼워 맞추듯이 이들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내가 이 시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수 천 년을 지나오면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 흘려 놓은
피의 대가를 먹고 있는 것이리라!
두우산 발 아래로 역사의 DNA가 담겨져 있는 섬진강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전율이 느껴진다.
천년 이천년 된 과거의 일들이 오늘의 나의 일들과 연결되고 하나의 맥이 되어
내 몸속 깊은 곳에 까지 넘쳐흐르는 듯하였다.
밤이 새도록 이들과 함께 섬진강을 지켜주어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바람 한 점도, 구름 한 조각도, 비 한 방울도...
오늘의 나를 있게 하기 위해 그 허송세월과 같은 세월을 보내고 또 보내었다.
아! 나의 존재여!
하산을 해야 하는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 몇 시간도, 단 한 밤도 같이 있어 주지 못하는 나약함에 미안함이 들었다.
강 건너 망덕포구에 가로등이 하나 둘 밝혀진다.
강과 바다의 접점인 섬진대교로 전조등을 길게 밝히고 차량들이 바쁘게 다닌다.
배알도와 망덕을 잇는 태인대교에는 바구리봉을 넘어선 태양이 걸렸다.
그 빛으로 섬진강은 하나의 화려한 조명이 내려앉은 초대형무대가 되었다.
객석이 된 고포와 용포마을, 섬진대교 건너 배알도와 망덕포구에서는
뜨거운 갈채라도 터져 나올 듯하였다.
갯벌에서도 온갖 현란한 작품들이 연출되고
그 언저리에 쉬고 있던 통통배도 적절히 몸을 움직이며 호흡을 맞춰주었다.
이 모두가 섬진강 환타지가 아닐까?
피니쉬 라인을 통과한 섬진강과 6백리를 함께 몸으로 때우면서 사계절을 보낸
섬진강 사나이의 개선을 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호국의 산 두우산에서의 그 전율과 배알도의 화려한 공연이 겹쳐져
나를 섬진강환상곡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한다.
두우산, 난 널 호국의 산으로 명명하노라!
지난 1천 년 간 외적의 방패를 넘어,
앞으로 천 년 만 년 섬진강을 지키고 섰으라!
그 섬진강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넘어,
갈사만과 광양만을 적시고 태평양의 자양분을 이루어
인류의 번영과 영화를 이루는 시원이 되라!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