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출신의 결혼이주 여성인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이 다문화 정책 토론회를 연 것은 지난 2012년 7월 11일이었습니다.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그날 토론회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외국인범죄척결연대’라는 단체에 소속한 것으로 알려진 60대 남자가 단상에 뛰어올라 소란을 피우다가 10여분 만에 끌려 나갔습니다. 한국에서도 외국인 이민자 혐오증이 수면위로 떠오른 것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창조도시를 측정하는 것은 살만한 도시를 측정하는 것과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한 도시에 창조적인 집단이 얼마나 있는지를 측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성애자와 비이성애자를 대비한 게이지수가 얼마인지, 부르주아들 사이에 묻혀 사는 보헤미안의 생활방식이 어떤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도시의 전제는 이질적인 사람들이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풍요로운 삶은 다양한 문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풍습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릴 때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왜 다양성이 풍요로운 삶을 보장한다고 말할까요. 다른 사름들의 관습을 이해하는 공감능력과 이질성을 생활 속에 받아들이는 관대함은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듭니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역량은 이질적이고 다양한 풍습을 누리고 즐기는 능력에서 나오는데 이를 ‘문화지능’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역 공동체 안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관용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프랑스 말의 톨레랑스(tolérance)입니다.
한국 사람은 순수한 한민족 공동체를 이루어 자신도 모르게 순혈주의를 신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에 결혼 이주민과 외국인 노동자가 급증하면서 미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복합민족국가가 되어가는 혼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단정하고 제거해버리려고 한다면 두 팔을 걷고 막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비로소 다민족국가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기에 창조적인 사회를 만드는 경험도 이제 막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1990년대 초반에 나의 개성과 다양성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나와 차이가 있는 타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10년이 지난 오늘에는 당초에 타자였던 그들을 우리사회의 일원으로 모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